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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조의 이 사람

 

쓴 사람 관리자
쓴 날짜 2011-06-04 (토)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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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살아 있는 국보,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


민속이 무엇이길래 어떤 이는 그 민속을 짊어지고 한평생을 살았다. 헐뜯고 모함하는 이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민속이란 짐을 내려놓지 않으려 몸부림친 이가 있다. 바로 제주민속박물관장 진성기 선생이 그다. 그에게 민속을 물으면 삶 자체라고 대답한다. 이십대 초반에 시작하여 제주도 구석구석을 헤매기 어언 55년. 조상의 숨결이 서려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고 그러한 유·무형 민속물을 찾아 목숨을 잃을 뻔한 모험도 마다치 않고 달려온 삶이었다.

그는 돈이 많은 부자도, 명망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제주 사람으로서 제주 민속을 보듬어 안고 사는 것이 자신이 이승의 삶에서 꼭 해야 할 천형 같은 그 무엇이라고 다짐하고 살아왔을 뿐이다.

제주시 일주동로 293-1. 제주민속의 고향! 제주민속박물관은 거기에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가정집 같은 2층의 아담한 사설박물관은 도심의 번듯한 국립박물관을 떠올리고 찾아가면 실망감부터 앞선다. 그를 뒷받침하듯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민속박물관 앞 작은 마당에서는 심심찮게 차를 돌리는 모습이 목격된다. 기자가 찾아갔던 날도 날렵한 외제차 한 대가 으리으리한 박물관을 기대하고 찾았다가 실망한 듯 차를 돌리고 있었다.

규모와 시설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은 여지없이 제주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오늘도 차를 돌리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있다. 내비게이션을 의심하면서 말이다.

미리 전화를 드린 탓인지 보슬비가 내리는 날 오전 이른 시각인데도 작달막한 키에 멋진 수염을 기른 인자한 모습의 노신사는 현관까지 나와 서서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박물관이 집이고 집이 박물관인 그 속에서 진 관장은 24시간 유물들과 자식처럼 지낸다.

▲ 도롱이(왼쪽, 앞에는 제주도말로 설명을 붙였다), 물허벅

▲ 통나무를 세 줄로 걸쳐 둔 제주만의 대문 정

박물관 입구에 마련한 두어 개 소파가 놓인 응접실에서 진 관장은 손수 커피를 타주며 기자를 반긴다. 찾는 이가 적어서인지 기자의 방문을 몹시 기뻐하며 타향에서 돌아온 아들처럼 살갑게 맞이하는 진 관장의 얼굴이 모처럼 환하다.

진 관장은 1964년 제주 전역에서 수집된 450여 점의 민속품으로 제주시 건입동에 자그마한 박물관을 세우고 그해 문교부로부터 사설 제주민속박물관 허가를 받았다. 대한민국 1호 사설 박물관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그의 스물여덟 살 때 일이다. 이후 1970년 제주시 일도2동에 70여 평의 건물을 지어 올리고 약 3천여 점의 민속품을 전시할 정도로 그는 민속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지금 사람들은 많은 돈을 들여 골동품 가게에 나도는 물건을 사다가 진열하는 게 민속 박물관인 줄 알지만 당시에는 일일이 발품을 팔아 동네를 돌며 돌멩이 하나라도 수집해야 하는 때였다. 지금처럼 도로가 갖추어지기 전 중산간 마을에서 얻은 무거운 돌 맷돌 하나를 짊어지고 어둑한 밤길을 걷다가 굴러 떨어진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렇게 모아진 민속품들은 모두 제주 지방 사람들의 혼이 배인 물건들이었고 그것은 곧 진 관장의 피와 살이었다.

▲ 진성기 관장이 낸 자서전 ≪보배를 지키는 마음≫, 디딤돌, 2010(왼쪽) 박물관 개관을 보도한 한국일보 1964년 6월 28일 자 기사

▲ 어머니가 물려주셨다는 매옹이소리, 저 소리에서 진 관장은 어머니를 볼까?

그런 그의 애장품을 보려고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섰다. 그러자 제주시에서는 번듯한 현대식 건물로 제주도립민속박물관을 짓기로 계획한다. 그것까지는 나무랄 수 없는 환영할 일이지만 박물관을 계획하던 제주도 공무원들은 진 관장의 애장품들을 “가치 없는 민속품”이라고 폄하한 채 진 관장의 사설박물관자리에 1979년 도립박물관을 짓기로 하고 수용해버리고 만다.

하필 넓고 넓은 제주 땅을 마다하고 진 관장이 세운 터를 시샘한 제주도청 측은 개인이 발로 뛰어 만든 사설박물관을 육성하고 키워주지는 못할망정 헐값으로 건물과 땅을 빼앗아 버리는 바람에 민속품들을 끌어안고 길거리로 나 앉아야 했다.

그러나 진 관장은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당시 진 관장이 이뤄낸 제주민속박물관을 헌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경향 각지의 인사들이 정부에 탄원서를 내주고 언론에 호소하는 등 제주민속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진 관장을 적극적으로 돕는 이들의 성원에 힘입어 1982년 다시 제주시 삼양동 대지 천여 평에 200여 평의 본관 전시실을 짓고 약 1만여 점의 민속품을 전시했다. 그해 제주민속박물관은 문화부에 재등록했으며 이는 진 관장의 제주 민속을 지키려는 절절한 의지가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의 제주사랑 정신이 고스란히 밴 민속박물관에 쏟은 공적은 이후 제주도 문화상과 외솔상 그리고 옥관문화훈장으로 이어졌다. 진 관장은 민속품을 모은 박물관에만 심혈을 기울인 것이 아니다. 쌓아 놓으면 자신의 키에 버금갈만한 높이의 제주관련 서적은 오늘의 그를 제주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남국의 민요》, 《남국의 무가》, 《제주 세시풍속》, 《제주 무속 서시》등 3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역작들을 읽지 않고는 제주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업적 또한 그를 ‘참 제주인’ ‘제주의 국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게 한다.

▲ 제주도와 남쪽지방 특유의 주둥이 달린 맷돌

▲ 등잔의 원시형태인 등판, 돌등잔, 살칵불(왼쪽부터)

현재 전시관에 전시된 민속품들은 대도시의 현대식 진열 시스템 속에서 호강하는 물건들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놓여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물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깨진 기와조각, 물레방아, 베틀, 농기구 하나에도 조상의 혼은 묻어 있는 것이며 화려한 조명 속에 놓여 있지 않다 해서 유물의 가치가 빛을 잃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조상의 숨결을 느낄 줄 모른 채 현대시설의 조명발 아래서 유물을 보아온 우리의 ‘유물기준’의 무지일 뿐이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면서 진열품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보존처리가 시급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게 어디 진 관장 혼자의 몸부림으로 가능할 것인가! 엄청난 국민의 세금을 투자하여 도립박물관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조상의 숨결이 가득한 사설 박물관의 허름한 유리진열장에 들어 있는 유물도 보물로 여길 줄 나라의 관심이 아쉽다. 제주도에는 정말 그런 눈을 가진 ‘진정한 민속품’을 볼 줄 아는 공무원도 없고 문화인도 없는 것일까? 아쉬웠다.

호주머니를 털어 서울에서 달려간 기자와의 환담을 마치고 전시관을 둘러 나오는 기자에게 진 관장은 한 권의 책을 쥐어 준다. ≪보배를 지키는 마음, 도서출판 디딤돌, 2010≫ 자서전 인 이 책에는 진 관장이 살아온 지난 75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박물관 뜰로 내려서자 뜰 한편에 제주무신궁 마당이 펼쳐져 있는데 진 관장은 손수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고 어떻게 보면 신령스럽기도 한 모습의 돌들을 설명해준다. 그것들은 제주 구석구석을 돌면서 찾아낸 제주 민속 신앙의 흔적들로서 지난 세월 제주인의 희노애락이 뚝뚝 묻어나는 신앙물(信仰物)이었다. 제주무신궁 안에 펼쳐진 가지각색의 돌들은 제주인의 얼굴이요, 혼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 또한 주차장 한쪽에서 이끼를 뒤집어 쓴 채 그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웠다.

▲ 박물관 뜰 한쪽에 세워진 143위의 무신궁

그 누가, 그 어떤 학자가 제주도 민속에 대해 진 관장만큼 알 수 있을까? 그건 단순한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열과 성을 다해 온 삶을 바친 진 관장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조상의 흔적을 ‘구닥다리 물건’으로 치부하는 한 그가 부여잡고 있는 민속박물관의 ‘보석’들은 볼 수 없다. 제주인의 모습은 곧 우리 한반도인의 모습이다. 제주의 뿌리는 곧 한반도의 뿌리인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진 관장이 수집해 놓은 보물들이 아름다운 진열장 속에서 빛을 발하게 되길 바라는 무거운 마음으로 박물관을 나왔다.

돌과 바람과 여자의 도시에서 탈피하여 제주도는 2002년 생물권보전지역, 2007년 세계자연유산, 2010년 세계지질공원 인증으로, UNESCO가 지정하는 자연과학 분야 3관왕을 모두 달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세계 7대 자연경관 예비심사 기준인 7가지 테마(섬, 화산, 폭포, 해변, 국립공원, 동굴, 숲)를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섬이다.

이곳에 진 관장이 평생 발로 뛰어 모은 손때 묻은 민속품들이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번쩍이는 진열장 속의 물건이 값진 게 아니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절 진 관장이 거두지 않았다면 사라졌을 유물들이기에 값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유물들이 곰팡이가 끼어 가고 있다. 제주를 찾는 이들은 한 번씩 발걸음을 하여 진 관장의 제주민속사랑 정신을 배우고 곰팡이 피는 민속박물관을 되살릴 방도를 이야기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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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방해한 좁쌀친구들도 따져보면 박물관을 있게 한 사람
[대담] 제주민속박물관장 진성기

-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꼭 온 삶을 바쳐 민속에 투자해야만 했었나?

“민속은 우리 조상의 소중한 발자취이다. 그냥 놔두면 머잖아 사라질 것들이다. 이를 누군가는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그게 내가 이승의 삶에서 지닌 몫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런 일은 고통이 수없이 따라오곤 했지만 어떤 일이건 올바로 하려 하면 고통은 따라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또 민속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은 간단히 해치울 것이 아니다. 정성을 가지고 오랜 세월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 그동안 제주도 민속을 껴안아 오면서 생긴 잊지 못할 일이 있다면?

“예전 젊었을 때는 민속을 수집한다는 것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종종 간첩으로 오해되기도 했었다. 또 민요를 채집했던 한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가 옮은 옴 때문에 며칠을 고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생을 통해 가장 큰 사건은 역시 좁쌀친구들의 방해였다. 내가 하는 이 작은 일마저 시기질투를 한 좁쌀친구들은 이 작은 민속박물관이 발전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고 여러 가지 방해를 해왔다. 심지어 내가 수집해 전시하는 민속품들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헐뜯기도 했다. 거기에 더하여 박물관 자체를 헐값에 수용하도록 한 좁쌀친구들은 내가 해온 민속 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은 크게 보면 민속 보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 현재 전시된 것과 수장고에 있는 것을 합치면 모두 몇 점 정도인가?

“무형민속 1만여 점, 유형민속품 1만여 점, 전적류가 1만여 점이다. 이들 대부분이 아직 수장고에 잠자고 있는데 전시공간이 700여 평정도면 모두 소화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눈에 볼 수 있고, 관광지로도 한 몫을 할 수 있는데 이러려면 투자자가 나와야만 한다.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접근할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

- 그동안 선생이 펴낸 책은 지금 편집하고 있는 책까지 합하면 모두 30여 권이나 된다. 대단한 집필인데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가? 또 그에 대한 감회는?

“맨 처음 낸 책은 <제주민요집>이었다. 민요를 채록하면서 책으로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속품들도 단순한 전시에 그친다면 유한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더 많은 사람이 학문적 성과를 공유하려면 책으로 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비용이 너무 벅찼다. 초기에는 인쇄비를 건지려고 내가 일일이 책을 팔러 다녔다. 그것이 어언 30여 권이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빌딩은 못 지었지만 책으로 빌딩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날그날 살기에 바빠서 책을 읽지 않는다. 특히 외래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지 조상의 숨결을 찾고 겨레의 슬기와 향기를 찾아보는데 인색하다. 내가 낸 책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혜가 듬뿍 담겼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 책들을 읽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돈 욕심을 내면 패가망신하기 쉽지만 책 욕심을 내면 책도 살고 제주도 살고 우리 겨레와 내가 산다.”

- 선생이 낸 책을 들여다보면 제주 토박이말이 살아서 숨 쉰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제주 토박이말을 사랑하고 글로 표현하기까지 할 수 있었나?

“민속연구 열심히 하다 보니까 저절로 우리말도 사랑하게 되었다. 바로 그 토박이말 속에 조상의 숨결, 겨레의 아름다움이 들어 있었다. 난 그걸 깨달은 것이다. 한자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맛깔스러움이 살아 있는 토박이말을 사랑하다 보니까 영광스럽게도 외솔상(외솔회가 외솔 최현배 선생을 기려 주는 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저 소박하게 우리 민속, 우리말, 우리 것이 좋은 것이더라.”

- 사람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무엇일까?

“제주도에는 등록된 박물관만 50여 개가 있으며, 등록 안 한 박물관도 50여 개나 된다. 그 가운데는 외래문화를 소개하는 박물관도 있다. 외래문화를 소개하는 것이 단순하게 우리 국민의 관심을 잠시 끌 수 있겠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외국인에게는 더욱이나 신기함을 줄 수가 없다. 진정한 우리 것만이 외국인에게 큰 호기심을 줄 수 있으며,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보물이다.

가장 우리다운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 것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면 세계인에게 우리는 대접받을 수 없다. 내가 살기 위해서도 우리 민속, 우리말,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대담하는 내내 진 관장은 고령에도 피곤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 것 얘기만으로도 힘이 나는 듯했다. 평생 우리 것만 사랑해온 진 관장을 보면서 우리는, 나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고 아담한 박물관에서 나는 선생이 평생 일군 진하디 진한 문화사랑 향기에 빠져들었다.

 

이름아이콘 이연실
2011-06-05 16:27
저도 제주에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제주의 보배라는 생각입니다.좋은 글 고맙습니다.
   
이름아이콘 제주독자
2011-06-06 17:04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주 살면서 자세한 진 관장님의 삶을 잘 몰랐습니다.
애들 데리고  민속박물관을 가보겠습니다.
   
이름아이콘 서영은
2011-06-06 21:23
아 제주도에 그런 분이 계셨네요.
정말 훌륭하신 분입니다.
모두가 본받아야 할
가보고 싶네요. 아니 만나뵙고 싶네요.
   
이름아이콘 나그네
2011-06-07 10:27
지역마다 진성기 관장님 같은 분이 계실겁니다. 그런 분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등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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